6·25 전쟁 배경
6·25 전쟁(1950~1953년)이 일어난 원인은 한반도 내부 문제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와 냉전 체제 속에서 남북한의 대립이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한반도는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각각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점령하면서 분단의 시작을 알립니다. 소련은 북쪽을, 미국은 남쪽을 점령했습니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를 따른 김일정 중심의 공산정권과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5년간 한반도를 임시 관리하겠다는 신탁통치를 논의했지만 남북한의 반응이 갈리면서 대립은 더욱 심화 됐습니다.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승인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수립합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수립합니다. 1948년 9월 9일에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한반도는 이렇게 완전히 둘로 나뉘게 되었고 분단은 고착화되었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 사이 남북한은 38선을 중심으로 1,000회 이상 국지전이 발생했습니다. 북한군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남한군은 군사력이 약한 상태였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소련)과 마오쩌둥(중국)에게 전쟁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스탈린은 처음엔 신중했으나 1950년 미국이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하자 전쟁 승인을 허락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의 분산력이 급격히 강화되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 국제 정세는 냉전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로 변하였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초기에는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낮았습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는 미국 방어선에서 제외"라는 발언을 하여 북한이 남침을 결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반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1950년 4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 지원을 요청했고 그것을 스탈린이 승인했습니다. 소련은 북한에게 최신 무기를 적극 지원했고 중국은 전쟁 발발 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6·25 전쟁 전개 과정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약 3년간 진행된 전쟁입니다. 전쟁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단계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함락, 2단계 유엔군 참전과 인천상륙작전, 3단계 중국군의 개입, 4단계 휴전 협상과 교착전입니다. 단계별로 더 상세하게 전쟁 전개 과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1단계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함락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인민군) 7개 사단이 소련제 탱크(T-34)와 중화기로 무장하고 38선을 넘어서 남침하였습니다. 전쟁이 개시된 직후 서울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했습니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국군과 정부는 대전, 대구 방면으로 후퇴합니다. 이승만 정부와 국군 지휘부는 후퇴 과정에서 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기세 등등 한 북한군은 대전, 대구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남쪽으로 계속 진격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인 부산 인근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북한군은 남침 후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을 거의 장악하게 됩니다.
2단계 유엔군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입니다. 유엔군은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전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전쟁을 지휘하였습니다. 1950년 8월에서 9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부를 벌이며 방어를 했습니다. 미국의 강력한 공중폭격과 해군 지원 덕분에 부산 방어선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끈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10월 말에는 압록강(중국 국경)까지 진격했습니다.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패퇴하면서 남한이 북한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3단계 중국군 개입과 국군 유엔군의 후퇴입니다. 중국 마오쩌둥이 북한 지원을 결정하여 1950년 10월 말 중공군 30만 명이 전쟁에 개입되었습니다. 11월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공세를 맞아 후퇴하게 됩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결국 서울이 다시 중공군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이를 1·4 후퇴라고 합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북한 측으로 기울어지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합니다.
4단계 교착전과 휴전협상입니다.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3월 14일 서울을 재수복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북진은 어려워져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고착됩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1951년 7월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포로 교환,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 등으로 협상이 난항을 겪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계하고 마침내 전쟁을 종료합니다. 그러나 이 정전협정은 평화 협정이 아니고 휴전 상태를 지속하는 협정입니다. 군사분계선인 현재의 DMZ, 비무장 지래를 설정하게 됩니다. 남북한 간 국경이 38선 근처로 확정되고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아직도 남북한은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결과 및 영향
6·25 전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 국제적인 전쟁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미국), 북한군 (중국 포함), 중국군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상을 체결했습니다. 남한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으니까요.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나지 않았고 한반도는 현재도 휴전 상태를 유지 중입니다. 정전협정에 따라 새로운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어 남북한의 국경이 되었고 군사분계선 주변에 비무장지대(약 4KM 폭의 무장 금지 구역)가 형성되었습니다. 남북한 모두 전쟁 목표 달성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북한의 한반도 공산화, 남한의 북한 점령과 통일은 결국 전쟁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전쟁 전에는 남북한이 다시 통일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전쟁 이후 분단이 완전히 고착화되었습니다. 남한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했고, 북한은 소련과 중국 중심의 공산주의 국가로 발전하였습니다. 3년간의 전쟁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도 남겼습니다. 남, 북한 사망 실종자는 약 250만 명이 넘고 유엔군과 중국군의 사망도 약 100만 명이 됩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도시, 산업 시설, 교통망이 파괴되어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 극심한 경제난을 겪게 됩니다. 남한은 전쟁 후 미국이 대규모로 경제를 지원합니다. 미국의 원조 덕분에 남한 경제가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한 경제가 미국에 의존하는 구조로도 변화했습니다. 전쟁 직후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주한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고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체제가 형성됐습니다. 북한은 전쟁 후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으며 경제를 재건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공업 중심의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북한은 전쟁 후 김일성 1인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강력한 군사국가로 변화시켜 군 중심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심화되었습니다. 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반공 정책을 강화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견제하고 소련은 공산 진영 확장과 미국과 대립을 지속했습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이 일본을 전쟁 보급 기지로 활용하면서 일본의 경제 성장은 가속화하였습니다. 일본은 6·25 전쟁 특수 효과로 경제 부흥을 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