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배경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1868년에 8월 27일에 조선 평안도 평양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홍범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사냥 실력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의감과 저항 의식을 키워나갔으며 그가 30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침탈과 조선의 멸망을 겪어 되자 자발적으로 의병에 가담하며 독립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홍범도는 본격적으로 무장 항일 조직을 만들어 의병 투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1920년 6월 연합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입니다. 이후 같은 해 10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수행하여 청산리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 최초의 조직적 승리로 평가받는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일 중국 지린성(길림성) 연길현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독립군과 국내 진입한 일본군의 전투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장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뼈저리고 느낀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많은 독립군 단체를 만주 지역에 만들어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범도, 최진동, 안무, 이청천 등은 각각 독립군 부대를 이끌며 무장 항일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5월 말 일본군이 독립군 토벌을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 봉오동 지역까지 침범하면서 봉오동 전투가 시작됩니다.
전투 전개
1920년 5월 말 대한독립군(홍범도 장군)은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 지역에 주둔 중이었고 인근에는 국민회군(최진동), 군무도독부군(안무) 등 독립군 부대들이 함께 활동 중이었습니다. 일본군은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고 만주로 넘어간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는 침공을 하게 됩니다. 야스카와가 이끄는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약 500명 규모로 만주의 봉오동 지역에 진입하여 독립군과의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홍범도는 봉오동 지형이 험하고 골짜기가 많다는 점을 이용하여 매복과 유인 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독립군은 세 부대(대한독립군,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를 연합군 체제로 편성하여 약 600여 명 규모로 협력 작전을 수립합니다. 전투 전날 밤 산 위에 매복 지점을 정하고 주요 진입로를 따라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1920년 6월 6일 새벽 무렵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합니다. 홍범도는 일부 부대를 미끼 부대로 활용하여 일본군을 봉오동 계곡 깊숙이 유인하였습니다. 일본군이 미끼 부대인 독립군을 보고 쫓아 계곡 안쪽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 산 위에 매복 중이던 독립군들이 일제히 일본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했습니다. 양쪽 측면과 후방에서 독립군이 공격하자 일본군은 완전히 포위당했습니다. 일본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고 당황했습니다. 삼면 포위 공격과 후퇴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독립군은 높은 고지에서 사격 우위를 확보했고 일본군은 유탄과 산악 지형에 의한 추가 피해도 입었습니다. 전투는 몇 시간 만에 마무리되었고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전투 결과와 영향
봉오동 전투는 대한독립군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일본군 사망자는 공식적으로는 60여 명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약 157명이 사망했던 걸로 추정됩니다. 반면 독립군은 피해는 극히 적었습니다. 전사자 4명, 부상자 10여 명 정도였습니다. 전투 시간 또한 수 시간 이내에 종결되면서 대한독립군은 큰 피해 없이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의 흐름을 바꿔놓은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 방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 전투로 남습니다. 봉오동 전투가 승리를 거두며 독립군의 사기가 높아지고 조직력 또한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장투쟁의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국내외 지지도 커졌습니다. 이 승리는 국내외 언론에도 보도되면서 일본군의 패배 소식이 세계적으로 퍼졌고 한국의 독립운동이 단순한 저항이 아닌 실질적인 군사력을 갖춘 운동으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독립군 활동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더욱 더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재외 동포들과 독립운동 자금원에게도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운동 내에서도 외교와 문화운동 중심에서 점차 무장 투쟁 중심으로 비중이 바뀌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해 군사훈련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1940년 광복군 창설과 독립운동의 군사 기반 확대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