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출생과 가문
조선시대 최고의 미녀로 꼽히는 장희빈은 본명은 "장옥정"이며 1659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생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많지 않아 정확한 날짜는 알지 못합니다. 장희빈의 가문은 중인 계층으로 조선 사회에서 양반보다는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식과 경제적 기반은 갖춘 계층이었습니다. 장희빈의 아버지는 "장현"으로 승문원에서 교리로 근무했습니다. 승문원은 조선 시대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중인 계층이 주로 근무하던 곳입니다. 장현은 비교적 학식이 있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크게 출세하지 못하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머니 윤 씨는 궁녀 출신입니다. 어머니가 궁녀였기 때문에 장희빈은 어린 시절부터 궁궐과 관련된 환경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희빈의 숙부(아버지의 형제)는 "장현우"로 남인 계열의 정치인이었습니다. 숙부가 남인 세력이었기 때문에 훗날 후궁이 되어 남인 세력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장옥정의 집안은 서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던 시대인데 남인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이유는 남인은 상대적으로 서인보다 개방적인 성향이었고 후궁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입니다. 장옥정이 숙종의 후궁으로 입궁할 당시 남인 세력이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장옥정은 중인 가문 출신으로 정식으로 양반 가문의 규수처럼 궁중에 들어가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궁녀인 어머니와 숙부의 정치적 영향력 덕분에 젊은 나이에 궁궐로 들어가 숙종의 눈에 띌 기회를 얻었습니다. 장옥정은 뛰어난 외모와 총명함으로 숙종에 눈에 띄고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었고 나중에 왕비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숙종의 총애
장희빈과 숙종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 권력과 정치가 얽힌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정말 아끼고 사랑했지만 정치적 환경과 왕실의 전통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갈등과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장희빈은 궁녀였던 어머니 덕분에 궁궐에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미녀답게 뛰어난 미모와 총명함은 숙종 눈에 띄었고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당시 숙종은 인현왕후(민씨)와 혼인한 상태였지만 부부 사이의 애정은 깊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부인보다 예쁘고 활발하고 매력적인 장희빈에게 빠져들게 되고 그녀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장희빈은 뛰어난 미모뿐만 아니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숙종 옆에서 보좌했습니다. 숙종은 성격이 강하고 정치적 야심이 컸으며 자신을 지지하는 여인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조용하고 정숙한 스타일이었다면 장희빈은 자신을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이어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더 끌렸을지 모릅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으로 책봉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녀를 예뻐했습니다. 1686년(숙종 12년) 장희빈은 "숙원"의 직위를 받으며 정식 후궁이 되었습니다. 이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도 전보다 커져갔습니다. 1688년(숙종 14년) 장희빈은 숙종의 아들을 출산합니다. 이 아이는 훗날 조선의 제 20대 왕 경종이 됩니다. 조선 시대에는 후궁이 왕자를 낳은 것은 왕비가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장희빈은 더욱 입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숙종은 태어난 아이와 장희빈을 더욱더 사랑하며 아꼈습니다.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희빈을 새 왕비로 삼고자 했습니다. 1689년(숙종 15년) 서인 세력(인현왕후 지지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세력(장희빈 지지 세력)이 권력을 잡는 "기사환국"이 발생합니다. 이를 계기로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습니다. 숙종과 장희빈은 정식 부부가 되었고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식 부부가 되고 난 이후부터 숙종의 사랑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은 성격이 자신이 지나치게 끌려다니는 상황을 싫어했고 점점 장희빈과 남인 세력의 커짐을 부담스럽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몰락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약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숙종은 점점 장희빈에 대한 마음이 식어갔습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이후 장희빈이 너무 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숙종의 심기는 날이 갈수록 불편해졌습니다. 결국 1694년(숙종 20년) 서인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는 "갑술환국"이 발생하면서 인현왕후가 복위를 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장희빈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후에도 여전히 정치적 야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왕비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숙종은 더 이상 장희빈을 이전처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1701년 숙종은 인현왕후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주술을 했다는 소문이 궁내에 퍼지게 됩니다. 숙종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결국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됩니다. 장희빈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숙종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숙종은 끝내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1701년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장희빈이 죽은 후 숙종은 그녀를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와 관련된 기록을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들(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장희빈의 존재는 역사 속으로 계속 회자되게 됩니다.
장희빈과 숙종의 뜨거운 사랑은 궁중에서 벌어진 가장 극적인 연애이자 정치적 비극으로 남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