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어린 시절
영조는 조선 21대 왕으로 어린 시절부터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영조는 1694년(숙종 20년) 10월 31일 숙종(19대 왕)과 숙빈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금(李昑)이며 후에 연잉군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당시 숙종은 장희빈을 폐위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숙빈 최 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를 매우 기뻐했고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과 함께 키우겠다며 특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 씨는 궁녀 출신이었지만 성품이 어질고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아들에게 유교적인 가치와 검소한 생활 태도를 강조하며 엄격하게 교육하였다. 영조는 후에 자신의 성격과 정치 철학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빈 최씨는 신분이 낮아 영조는 왕실 내에서 차별과 견제를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영조의 형은 경종으로 숙종의 장남이자 장희빈의 아들이었다. 경종은 장희빈 사건(1694년) 이후 정치적으로 불안한 위치에 있었으며 노론과 소론의 대립 속에서 왕세자가 되었다. 반면 영조는 어머니가 숙빈 최 씨라서 상대적으로 정치적 부담은 적었지만 경종과 비교되며 왕실 내에서 미움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두 형제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긴장감이 있었고 이후 대립은 더 심해졌다. 영조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차별과 소외를 받았지만 학문과 무예에 힘쓰며 내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영조는 어릴 때부터 한자와 유학 경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사서삼경과 역사 공부를 좋아했고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유학자들과 토론하면서 정치에 대한 견해를 넓혀 나갔으며 훗날 조선 최고의 학구적인 왕으로 평가를 받았다. 영조는 어려서부터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소식, 검소한 옷 입기, 사치 금지 등의 습관을 익혔고 왕이 된 후에도 절약하는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영조의 형인 경종이 제20대 왕으로 즉위한다.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아 사실상 왕위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론은 이를 반대하여 연잉군을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172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영조는 조선 2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영조의 주요 정책
영조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52년)를 유지한 군주였다. 그는 탕평책을 통해 붕당 정치를 완화하고 조세 개혁과 민생 안정 정책을 추진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안정시켰다.
영조의 주요 정책 중 가장 대표적인 정책을 꼽으라면 탕평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치의 가장 큰 문제였던 붕당(정당)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완론 탕평을 펼쳐 당파 간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고 후기에는 준론 탕평을 펼쳐 특정 세력을 강하게 탄압하여 붕당 싸움을 강제로 종식시켰다. 1742년에는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탕평비를 세워 신하들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영조는 붕당 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썼지만 영조 사후에도 붕당 간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민생 안정 정책으로 1750년에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기존의 군포(군대 세금) 부담이 크자 군포를 2 필에서 1 필로 줄였다. 그리고 부족한 세금은 선박세, 어장세, 염세(소금세) 등으로 보충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이후 변화된 법과 제도를 정리하여 "속대전"을 편찬하였다.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왕에게 호소할 수 있도록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다.
문화와 교육 정책으로는 한문 글쓰기에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표현을 금지하고 정통적인 유교적 문장만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문체 반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학문과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학자들에게 연구를 지원하였다.
사도세자 사건
사도세자 사건(임오화변)은 1762년(영조 38년) 조선 21대 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이후 조선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도세자는 본명 이선(李渲), 아버지는 제21대 왕 영조 어머니는 정성왕후 서 씨이다. 1735년 2월 13일에 태어나 1762년 7월 12일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배우자는 혜경궁 홍 씨이며 아들은 조선 22대 왕 정조이다. 1735년 영조의 아들로 태어나 1749년(15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는 매우 엄격하고 원칙주의적인 성격으로 학문을 중요시하였다. 사도세자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지 못하자 영조는 점점 실망하고 폭언과 질책을 했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에는 순한 성격이었지만 점점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언과 냉대를 받으며 점점 분노와 좌절감은 커져갔다. 결국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궁녀들을 해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이용당하며 입지가 불안했다.
사도세자의 정신적 불안정함과 폭력적인 행동이 심해지자 신하들이 탄핵을 시작했다.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특히 노력 세력은 영조에게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나라가 위험해진다"며 강하게 압박했다. 1762년 5월 영조는 결국 사도세자를 세자에서 폐위하고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뒤주(나무 상자)에 가두는 방식으로 처형을 결정했다. 사도세자는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굶어 죽게 된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조선 22대 왕)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즉위 후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라는 묘호를 내려 추존하고 사건에 책임이 있는 신하들을 숙청하였다. 사도세자 사건 이후 조선의 왕실 내부의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정조 역시 끊임없이 암살 위협을 받았다.
사도세자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조선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비극저인 사례이다. 이후 이 사건은 많은 문학 작품, 드라마,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