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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5대 왕 광해군 어린시절, 주요업적, 몰락, 관련 작품

by 역정이 2025. 3. 12.

광해군의 어린 시절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은 본명은 이혼(李琿)이며 1575년(선조 8년) 6월 4일 한양(현재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 씨입니다. 선조의 자식 중 둘째 아들이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는 불리했습니다. 어머니 공빈 김 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광해군이 태어난 지 3년 후인 1578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다른 후궁들과 왕비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정비가 낳은 아들이 아니었기에 어린 시절 정치적으로 큰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선조의 첫째 아들이었지만 성격이 난폭하고 정치적으로 자질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선조는 적자 왕세자를 확정하지 않고 후계자를 고민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왕자 신분으로 유교 경전과 역사, 정치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신하들과의 토론에도 능숙하고 정치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이이와 성혼 등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의 학문을 익혔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선조는 전쟁 초기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왕세자가 없었기 때문에 국가 운영을 맡을 후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1592년 7월 선조가 피란 중 왕세자로 광해군을 책봉합니다. 이는 전쟁 중 국가를 안정시키고 후계를 정리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무능하였고 명나라와 조선 신료들이 광해군을 지지하여 광해군은 적자가 아님에도 왕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중 광해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돌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군사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1597년 전쟁 후반에도 조정을 이끌며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뛰어난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실질적인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의 뛰어난 지도력과 안전적인 국정 운영에도 선조는 광해군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자였던 광해군은 전란 복구를 주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견제하고 새로운 적통 후계자로 영창대군(적자, 1606년 출생)을 왕으로 밀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에 신한들은 대북파, 소북파, 서인파로 나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대북 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서인파는 광해군과 대북파를 견제하며 왕위 계승을 반대했습니다. 1608년 선조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당시 정치적으로 많은 적을 두고 있었지만 전란 중 지도력을 인정받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어린 시절 평범한 왕자였지만 임진왜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성장하며 왕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광해군의 주요 업적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 복구, 실리 외교, 대동법 시행, 문화 및 의학 발전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란 복구 정책입니다. 입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고 광해군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조세 징수 체계를 정비하고 전쟁 후 황폐해진 농토를 재정비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했습니다. 호패법을 강화하여 백성들의 신분을 정확히 기록하여 세금 부과와 군역 징수를 공정하게 했습니다. 호패법은 이전부터 시행되었지만 광해군 때 더욱 철저히 운영됐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복원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전국 성곽과 관청을 재건했습니다.

둘째, 대동법 시행입니다. 광해군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대동법은 백성들이 특산물(공납)을 바치는 대신 쌀, 베, 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처음으로 경기도에서 시행되었고 이후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특산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공납의 폐단인 부패와 불공정 과세를 해결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었습니다. 대동법 시행으로 조세가 전보다 안정적으로 확보되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습니다. 이후 효종과 숙종 때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후기 경제 개혁의 초석을 마련했습니다.

셋째, 명과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의 속국이었지만 이 시기에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조선을 전쟁에서 보호하기 위해 중립 외교를 펼쳤습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보내 후금과 싸웠으나 패배하였습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후금에게 항복하도록 지시하여 조선의 피해를 최소화했습니다. 이후 명나라를 섣불리 돕지 않고 후금과 충돌을 피하면서 조선을 보호하는 현실적인 실리 외교를 했습니다. 

넷째, 의료 및 문화 발전에 힘썼습니다. 1610년 명의 허준이 편찬한 조선 최고의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완성됐습니다. 동의보감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사용됐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한양을 복구하고 도로망을 정비하여 경제를 활성화했습니다. 광해군 때는 금속활자를 이용한 출판 기술이 발전하여 다양한 문서와 서적이 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군사개혁입니다. 선조 때 처음 설치된 훈련도감을 더욱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조총(총포) 부대를 강화하여 후금과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전란 이후 약해진 조선의 군사력을 회복하기 위해 전국 군사 체계를 정비했습니다. 

창덕궁 고궁 모습
창덕궁 고궁 모습

광해군의 몰락

광해군은 조선의 국정을 개혁하고 실리 외교를 추진했지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의 몰락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폐모살제, 왕실 내부 숙청으로 인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광해군은 서자 출신이라 적통과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선조가 말년에 영창대군(적자)을 출생하며 왕위 계승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창대군(적통 후계자)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1618년 폐위하고 서궁에 우폐하였습니다. 이를 본 신하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패륜적인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당시 11살의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살해했습니다. 이는 정통성을 중시하는 유학자들과 서인 세력에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왕실 내부 숙청으로 신하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에 대한 비판이 점점 커지면서 정치적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둘째, 실리 외교에 대한 반발이 컸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은 명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습니다. 강홍립의 후금 항복 사건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명나라가 점점 쇠퇴하고 후금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조선의 생존을 위해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하자 전통적인 명나라 사대외교를 지지하는 서인 세력들은 반발했습니다. 결국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에게 굴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셋째, 강경한 왕권 강화 정책에 따른 신하 숙청 및 정치적 탄압입니다. 광해군은 자신을 지지하는 대북 세력인 정인홍, 이이첨 등을 중심으로 정권을 운영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서인, 남인 세력을 견제하고 숙청했습니다. 서인(서경덕, 이귀, 김류)과 남인(윤선도 등) 세력을 강하게 탄압, 유배, 사형 등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정치적 반대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서인은 반정을 계획하게 됩니다.

결국 1623년 3월 12일 서인 세력인 김류, 이귀, 이괄 등이 주도하여 광해군을 몰아내는 쿠데타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서인 세력이 한밤중에 병력을 동원하여 도성인 한양을 점령하고 궁궐을 공격했습니다. 광해군은 저항하지 못하고 체포됐습니다.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조가 조선 제1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후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641년 유배 생활 중 67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광해군 관련 작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남한산성>, <간신>, 

-드라마 <왕의 얼굴>, <화정>, <대왕의 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