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김영삼 고향 소개
김영삼은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이니다. 재임기간은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그는 군사 정권 종식 이후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첫 번째 대통령으로 평가받습니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생가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김 전 대통령이 태어나서 13세까지 성장한 곳입니다. 대계마을이라는 이름은 마을 앞 바닷가에 닭의 형상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 큰 닭섬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생가는 1983년에 지어진 목조 기와 건물로 본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노후되어 2000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친인 김홍조 옹이 대지와 건물을 거제시에 기증하였고 거제시는 이를 복원하여 2001년 4월 26일에 국민들에게 개관하였습니다. 생가 내부에는 김 전 대통령의 유년시절부터 대통령 재임 시절까지의 사진과 휘호 등이 전시되어 있고 그의 생애와 업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생가 옆에는 2010년 6월 18일에 개관한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이 있습니다. 이 전시관은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운동과 정치적 삶을 보여줍니다. 전시관 1층에는 학창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 활동 시절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대통령 재임 시절의 전시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방문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정치 활동과 업적
김영삼 대통령은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자유당 소속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야당 중심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회에 최연소 나이에 입성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강하게 반발하며 신민당에서 야당 지도자로 급부상하였습니다. 1979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여 "유신 철폐"를 외친다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고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며 민주화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1987년 전두환 정권 말에 민주화 바람이 거세지자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양김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자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낙마하였습니다. 당시 노태우가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1990년에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가 소속된 3개의 정당을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해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 선택은 정권 획득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평가됩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김영삼은 대한민국 최초의 문민 대통령으로 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군의 정치 개입은 이제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국민들에게 군사 정권 종식을 공식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취임한 첫 해 1993년에 군 내 비공식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체합니다. 하나회는 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실세들이 주도하던 군 내 비공식 사조직으로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조직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요직을 교체하고 하나회를 해체하여 문민통제 원칙 구현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근절을 위한 조치로 당시 예상치 못한 전격 발표로 충격을 주었지만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정책이었습니다. 금융 거래의 실명화를 통해 탈세, 정치 자금, 검은돈을 근절하여 투명한 금융 거래의 첫 단추를 끼웠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실시합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 여론을 수렴하여 5.18 관련자 책임을 추궁하여 법적 조치하였습니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여 반란죄와 내란죄 유죄 판결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는 대통령이 직접 과거 군부 독재 청산에 나선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힙니다.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중단됐던 지방자치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 전면 선거제를 도입하고 지역 주민의 자치권을 강화시켰습니다. 이는 지역 균형 발전과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 및 국회의원, 판검사 등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 및 공개를 위무화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확대하고 청렴한 공직사회를 구현하였습니다. 교육 개혁에도 앞장섰습니다. 대입 본고사 폐지 이후에 혼란스러운 교육 환경에 대해 개혁을 시도하여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고 자율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일부 성과가 있었으나 실질적인 교육 불평등 해소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96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에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 선언으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과다한 개방으로 인해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우며 각종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자신의 아들 김현철까지 구속 수사받았으며 이는 대통령 친인척까지도 예외 없이 수사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다수의 고위 공직자와 재벌에 대한 수사 및 처벌을 하였습니다.
IMF 외환위기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말인 1997년 외환보유고 부족, 기업 구조 악화, 금융기관 부실 등을 이유로 경제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같은 해 11월 결국 대한민국이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김영삼 정부에 큰 정치적 타격을 남기게되었습니다. 당시 대량 실업, 임금 삭감, 기업 파산 등 국민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습니다. 1998년 실업률이 7% 이상으로 급등하여 약 180만 명 이상이 실직하여 실업 대란을 겪었습니다. 기아자동차, 한보철강, 해태제과 등 수많은 대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매각되었습니다.
IMF를 직접 체결한 사람은 차기 대통령 당선자인 김대중과 부총리 임창열이었지만 IMF 위기의 원인과 책임은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에 있습니다. 김영삼은 퇴임 직전 "나는 IMF 외환위기라는 큰 고통을 남기고 떠나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어떠한 사익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다."라는 발언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