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배경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1467~1590) 동안 전국적인 내전을 겪고 있었다. 여러 다이묘(지방 영주)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싸웠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면서 일본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 동안 사무라이들은 계속된 전쟁으로 먹고살아서 전쟁이 끝나자 실업 상태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무라이들을 다스리기 위해 외부로 전쟁을 확대할 생각을 합니다. 중국(명나라)과 인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위해 먼저 조선을 점령할 생각을 합니다. 조선을 발판 삼아 명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라고 요청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전쟁을 결심합니다.
조선은 1392년 건국 이후 큰 외침이 없이 약 200년간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국방 체제가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무신보다 문신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군사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지방 군사조직도 약해지고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화포와 총기 등 신무기 개발도 정체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위협을 과소 평가했습니다. 일본이 명을 공격할 것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림본은 섬나라라서 대륙을 침략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혀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방어 체계인 진관체제, 제승방략은 실전에 효과적이지 못했고 조선은 일본군의 화승총(총포병력)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습니다.
명나라는 16세기 후반부터 내부적으로 지속적인 국방비 지출로 경제가 약화되는 재정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방 만주지역의 후금(청나라 전신)의 성장으로 새로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의 배경은 일본, 조선, 명나라 세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의 야망과 조선의 준비되지 않은 국방력, 명나라의 내부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개 과정
임진왜란은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1598년 일본군의 철수로 끝납니다. 전쟁을 크게 일본군의 침략과 조선의 패배, 명나라의 개입과 반격, 정유재란과 일본군의 철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592년(임진년) 일본군의 침략과 조선의 패배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15만 명이 부산포 상륙 후 기습 공격을 합니다. 조선군은 대비하지 못했고 부산진과 동래성이 함락됩니다. 일본군은 화승총(총포병력)으로 조선군을 압도하며 빠르게 북상합니다. 조선 조정은 급히 신립 장군에게 방어를 맡깁니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을 막으려 했으나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대패하고 맙니다. 신립 장군은 패배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고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한양을 위협합니다. 신립의 패배 이후 조선 조정은 수도인 한양을 지킬 방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선조는 한양을 포기하고 개성, 평양,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2일 한양을 점령합니다.
1592년 조선은 일본에 반격을 하고 명장 이순신 장군이 활약합니다. 1592년 6월 일본군은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 전라도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라도에서는 곽재우, 고경명 등 의병들과 관군이 강하게 저항하면서 일본군의 진출을 막아냅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빼앗지 못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조선의 수군은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첫 승리이며,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첫 등장하게 됩니다. 1592년 7월 8일의 한산도대첩에서 일본 해군을 궤멸시키며 제해권(해상 통제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해상 보급이 막히고 전세가 역전됩니다. 그리고 조선 각지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가 있으며 일본군은 예상보다 강한 저항을 받으면 점점 지쳐가게 됩니다.
1592년 12월 명나라가 조선을 돕기 위해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4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합니다. 1593년 1월 8일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평양을 탈환하며 일본군이 후퇴하게 됩니다. 1593년 5월에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일본군을 한양에서 몰아내서 한양을 탈환합니다. 일본군은 점점 전쟁에서 밀리면서 1593년 5월 부산 일대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서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협상이 결렬되면서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휴전 협상이 결렬되면서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1597년 8월 일본군 14만 명이 다시 조선을 공격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도 일본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한양까지 접근했으나 조선군과 명군의 저항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해임하고 원균을 수군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나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조선 수군이 거의 괴멸한 상태가 됩니다. 이후 다시 이순인이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597년 9월 16일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 133척을 격파하는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길어진 전쟁으로 일본 내에서도 전쟁 반대 여론이 커졌고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합니다. 일본군이 철수하던 중 조선과 명 연합수군이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일본군은 노량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에 전사하게 됩니다. 1598년 12월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쟁의 막을 내립니다.
임진왜란 결과 및 영향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가 모두 큰 피해를 본 전쟁이었다. 전쟁 후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졌으며 일본과 명나라도 큰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의 현장이었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었다. 백성 수십만 명과 군인, 관료들이 사망하였고 전국 각지가 초토화되었다. 일본군이 조선의 불상, 서적, 도자기 등의 문화재를 약탈했고 경제는 붕괴되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유량민이 되었고 유교적 신분 질서도 흔들리게 됩니다. 일본은 전쟁 실패로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성립했습니다.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무기와 군사 기술이 발전했고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장인으로 일본 도자기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 원조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어 경제가 악화 됐습니다. 후금의 성장으로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1644년 결국 명나라는 멸망합니다.
조선은 전쟁을 치른 뒤 국방 개혁을 합니다.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해서 수도 방어를 위한 상비군(직업 군대)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의 조총(총포)에 대응하여 화포와 조총 개발을 하고 한양과 주요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곽을 개축합니다. 조선은 전쟁 중 백성, 노비, 양산이 뒤섞여 싸우면서 신분에 대한 의식 변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농업 회복을 위해 힘씁니다. 토지 조사 및 재분배 실시와 농업 재건 정책을 추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