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가정환경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음력) 경상북도 구미군(현 구미시) 상모면에서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는 평범한 농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농부였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어머니 백남의는 독실한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사람으로 박정희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박정희 태어날 당시 부모님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박정희는 늦둥이 막내였습니다. 박정희 어머니는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며 매우 애지중지했다고 전해집니다.
1923년 6세의 나이로 구미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용품 조차 마련하기 어려웠지만 공부에 흥미를 보이고 성적도 우수했다고 합니다. 특히 수학과 일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교사였던 이병규 선생님 박정희의 학업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형편이 어려웠으나 교사의 권유로 계속 공부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박정희는 어린 시절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어머니 밑에서 자란 박정희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1932년 15세에 교사가 되기 위해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사범학교는 수업료가 면제여서 경제적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으며 군국주의적 사고방식도 형성되었습니다. 1937년 20살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경상북도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됩니다. 하지만 1년 만에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군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군인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교사에서 군인으로 전향하여 일본군, 대한민국 국군, 그리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장악까지 거친 특이한 군 경력을 가졌습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교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군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1939년 만주국(일본 괴뢰국)에서 군관학교 지원서를 접수합니다. 1940년 만주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합니다. 이후 수석 졸업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유학을 갔습니다. 1944년 일본군 중위 계급으로 임관 후 만주국 군 장교로 복무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일본군 소속으로 만주 지역에서 군인으로 근무합니다. 그래서 항일 무장 독립군 토벌 작전에 참여했다는 논란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군수 및 행정 업무 담당이었지만 실제로는 작전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1945년 광복 이후 고향인 구미로 귀향을 합니다. 미군정이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하면서 군에 다시 입대합니다. 하지만 1948년 남로당(공산주의) 연루 혐의로 숙청됩니다. 그러나 1949년 반공 전향을 증명하며 복권되어 다시 국군 장교가 되었습니다. 1949년 군 내부에서 전략 및 정보 분석 담당하며 복무하였고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전쟁 당시 군 작전 부문에서 활약을 하여 1953년 대령으로 진급 후 사단장 보직을 수행했습니다. 전투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전략가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1955년 육군 준장(1성 장군)으로 진급하고 미국 육군 참모대학으로 유학가서 미국식 군사 전략 교육을 이수합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권인 장면 내각을 출범합니다. 군 내부에서 정부의 국방 정책과 인사 문제에 대한 불만을 증가하여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단행합니다. 이를 5·16 군사정변이라고 합니다. 이 쿠데타는 성공했습니다. 서울을 점령하고 계엄령을 선포해서 정부 기능을 정지 시켰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실정을 장악한 후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후 정식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대통령 주요 업적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후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18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경제 발전과 산업화, 그리고 권위주의적 통치와 인권 탄압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경제 발전과 산업화입니다. 박정희 대통령하면 가장 대표적인 한강의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성장시킨 경제 개발 정책입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0%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수출 중심의 경제 정책을 추진했고 1977년 대한민국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주요 산업으로는 섬유,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 산업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에 이어 떠오르는 단어 새마을 운동입니다. 농촌 현대화를 위한 국가 주도 개발 정책으로 농촌 도로와 주택 개량, 소득 증대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국가 강요로 인해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고속 경제 성장과 산업 구조 고도화를 달성했고, 1970년 경부고소도로 건설 후 개통하여 서울과 부산 간 물류 교통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중화학 공업 육성을 통해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설립하고 조선, 전자,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여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 성장을 촉진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고 1971년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설립하여 공학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둘째 국방 및 군사력 강화입니다. 1964년 베트남 전쟁 참전을 결정하여 대한민국 군인 약 32만명을 파병하였습니다. 월남전 파병으로 한미 관계는 강화되었고 미국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받았습니다. 1970년에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 군사 기술 개발을 시작했고 방위산업을 육성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셋째 정치 및 독재 체제입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을 발표했습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법이었습니다. 대통령의 6년 연임을 허용하고 간접선거제 도입으로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탄압을 강화하여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습니다.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했습니다. 유신 반대 시위를 탄압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마항쟁과 학생운동 진압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활용한 감시 체제를 강화하여 정치적 반대자를 체포해서 고문하고 1974년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반정부 인사를 사형 집행하였습니다. 경제 발전으로 국민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으나 독재 체제 지속으로 사회 불만은 증가했습니다.
넷째 외교 정책입니다. 한미 관계를 유지하고 경제 원조를 확보했습니다. 미국의 경제 지원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카터 행정부(1976년 이후)와 갈등으로 주한 미군 철수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 무상 지원받았으나 과거사 청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반대 여론도 발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으로 남북 대화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남북한 첫 공식 합의이자 통일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남북 대화는 중단되었고 긴장은 지속되었습니다.
암살 사건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에 일어납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다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사살합니다.
1979년 대한민국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유신 독재 장기화로 국민들의 불만은 증가하였고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 지역 시민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하는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박정희는 이에 강경 대응을 지시 하여 군 투입을 논의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은 생각이 달라 대립이 심화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는 박정희를 제거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경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청와대 경호 관계자 등이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을 갖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부마항쟁을 더 강경하게 진압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이에 옆에 있던 차지철은 김재규를 공개적으로 무능하다는 말로 무시를 합니다. 오후 7시 40분경 김재규는 자신의 권총을 꺼내 차지철을 먼저 사살하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격을 합니다. 두 발 모두 명중하고 즉사를 합니다. 총격 후 현장은 대혼란에 빠지고 경호원과 총격전이 발생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후는 가장 믿고 아꼈던 부하인 김재규 총에 의해 맞이하게 됩니다.
김재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박정희를 제거했다 말하였고 박정희가 더 이상 대한민국을 망쳐선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게되었습니다.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