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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어린 시절, 왕비의 삶, 을미사변, 관련 작품

by 역정이 2025. 3. 15.

명성왕후 어린 시절

명성왕후는 1851년(철종 2년) 10월 25일 (양력 11월 17일)에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민자영, 여흥 민 씨입니다. 여흥 민 씨 가문은 조선 시대 왕비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직계 가문은 비교적 몰락한 양반 집안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명성와후는 1858년 8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성장합니다.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여성과 달리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유교 경전에 능통했습니다.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배우며 정치와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이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863년 조선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당시 12세 고종이 즉위합니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당시 왕비 후보로 여러 명의 명문가 여식들이 거론됐습니다. 명성왕후는 여흥 민씨 출신으로 가문이 좋고 총명하며 학식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게 됩니다. 특히 그녀의 집안은 비교적 몰락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독자적인 기반이 없다는 점이 왕실 입장에서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을 인물로 왕비를 결정합니다. 결국 1866년 (고종 3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됩니다. 

 

왕비의 삶

1866년 16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 된 이후 정치적 감각을 키워 나갑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초반에는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를 합니다. 하지만 명성왕후는 점차 민 씨 친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나갑니다.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명성왕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의 쇄국정책(서양과 단절)을 반대하고 개화를 지지했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본격적으로 명성왕후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이 신식 군대에 비해 차별을 받자 반란을 일으키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이 명성왕후를 공격하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보호국처럼 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도와줬다는 구실로 조선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졌습니다. 이처럼 명성왕후는 청나라와 협력하여 친청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본과 개화파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친일 정권 수립을 시도하는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명성왕후는 청나라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여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후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조선은 청·일 양국의 대립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운명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됩니다. 이후 일본이 조선의 내정 개혁을 강행합니다. 이에 명성왕후는 일본의 개혁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협력하며 친러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명성와후는 조선을 독립국으로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연대를 하게 되는데 일본은 그녀를 정책의 가장 큰 방해물로 간주하고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왕후를 시해 후 시신을 불에 태우는 참혹한 사건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일본이 주도한 명성왕후 시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암살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에서 청나라를 영향력을 몰아내 조선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일본은 김홍집 내각을 앞세워 갑오개혁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명성왕후는 일본의 개혁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과정이라고 판단하여 러시아와 손잡는 친러 정책을 펼칩니다.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명성왕후를 가장 큰 방해물로 여긴 일본은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895년 10월 초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명성왕후 제거 계획을 수립합니다. 일본 무사 약 50여 명을 동원하고 일본군이 이를 지원하게 합니다. 10월 8일 새벽 일본군과 무사들이 경복궁을 습격합니다. 일본군과 무사들이 경복궁의 수비병들을 제압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일본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명성왕후를 찾기 위해 후궁들과 궁녀들을 끌어내 폭행했습니다. 명성왕후를 발견한 일본 무사들이 그녀를 무자비하게 살해 후 시신을 훼손하여 궁궐 뒤뜰에서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왕실 암살 사건이자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명성왕후 시해 후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이게 됐습니다. 이후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후 친러 내각을 수립합니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미사변은 단순한 암살 사건이 아니라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철저히 침탈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명성왕후
명성왕후

관련작품

-드라마 <명성황후>, <철인왕후>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뮤지컬, 연극 <명성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