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안중근은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음력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유학자이자 지역 유지 안태훈이며, 어머니는 조마리아입니다. 본관은 순흥 안 씨이며, 형제는 동생 안성근과 안공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똑똑하고 정의감이 강했으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안중근의 집안은 유학을 숭상하는 명문가로 집안이 학문을 중요시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후손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집안에서 자라면서 어린 안중근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지도자 역할을 자주 맡아서 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했고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조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중국 고전과 역사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유학뿐만 아니라 무술과 활쏘기 등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과 신식 학문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894년 안중근이 15세 무렵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됩니다. 이후 1897년 18살에 부모님의 권유로 세례를 받으며 토마스(Thomas) 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됩니다. 천주교는 훗날 안중근의 사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안중근이 성장하던 시기는 조선 말기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15살 무렵에는 청일전쟁이 있었는데 그 시기에는 조선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모습을 보고 일본에 대한 강한 반감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16살의 안중근은 더욱더 일본에 대한 분노가 커지게 됩니다. 이후 1905년 안중근이 26살이 되던 해에 일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자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일본의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일본의 강압적인 정책과 조선인들의 무차별한 차별과 학살을 보면서 나라를 위해 싸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독립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안중근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1907년 고향인 황해도에서 50여 명의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합니다. 이후 함경도로 이동하여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과 직접 교전을 치릅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으로 인해 만주로 이동하게 됩니다. 1909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동의단지회"를 결성합니다. 독립운동가 11명과 함께 왼손 약지를 자르고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남기며 독립을 맹세합니다. 훗날 후손들에게 전해진 안중근의 손가락 사진은 그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동의단지회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고 일본 요인 암살을 계획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는 조선의 교육을 피폐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안중근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며 독립 정신과 실력 양성을 강조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한학, 수학, 서양 문물 등을 가르쳤습니다.
안중근의 가장 상징적인 독립운동으로 꼽는다면 바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일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로 말 할 것 같으면 1905년 일사늑약 체결의 주도자로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내며 조선의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을 계획한 중심인물입니다. 안중근은 이런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것이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사를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권총 6발을 발사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합니다. 저격 직후 러시아 경찰에게 바로 체포됩니다. 그러나 체포된 후에도 태연하게 "코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체포와 순국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고 러시아 경찰에게 바로 체포됐지만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는 침략자이며 나는 독립군으로 정당한 전쟁을 수행 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안중근을 단순한 살인범으로 취급했습니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에서 "동양평화론"을 발표하며 일본이 침략을 멈추고 동아시아 국가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동양평화론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조선, 일본이 협력하여 서양 세력에 대응해야 하고 전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동양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조 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본 법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일본군에 의해 교수형에 처하게 됩니다. 사행 집행 전까지도 "내가 죽더라도 3대 안에 반드시 조국이 독립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 받습니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하얼빈역과 서울에 안중근 기념관을 세웁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안중근의 유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 유해를 하루빨리 찾아서 고국으로 모셔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