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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어린 시절, 정치 활동, 대통령 업적, 가족

by 역정이 2025. 3. 6.

어린 시절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121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김해 김 씨이며, 부모님은 농업에 종사하며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독서를 즐겼습니다. 신안군 하의도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은 훗날 그의 정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정치 활동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한 정치인으로 야당 지도자, 민주 운동가, 대통령으로서 활약했습니다. 

긔의 첫 정치 입문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였습니다. 그러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후 1961년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5·16 군산정변(박정희 쿠데타)으로 인해 정치활동이 정지되었습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야당 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어 득표율 46.3%로 선전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출범 후 정치적 탄압을 받았습니다. 1973년 8월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경쟁하며 야당 지도부로 급부상했습니다. 선거는 패배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며 반정부 활동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이에 김대중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1973년 8월 8월 일본 도쿄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의해 김대중은 강제로 끌려가게 됩니다. 납치 후 일본 요코하마 인근 바다로 이동하여 선박에 태워집니다. 대한해협에서 수장(바다에 던져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합니다. 납치된 후 김대중은 손발이 묶인 채 감금되었고 배 위에서 철제 추를 달아 바다에 던질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인해 살해 계획은 중단됐습니다. 1973년 8월 13일 납치된 지 5일 만에 서울 자택에서 갑자기 풀려났습니다. 일본 정부가 강하게 항의하고 미국도 개입하니 국제적 외교 문제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살해하지 못하고 석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후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협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치 탄압을 본격화했습니다. 그로 인해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 지도자와 민주화 운동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김대중이 배후에서 조종한 폭동이라고 조작하여 내란음모죄, 계엄법 위반, 반국가행위 등의 혐의를 씌워 재판에 넘겼습니다. 1980년 5월 20일 김대중은 자택에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980년 9월 17일 김대중에게 1심 사형 선고가 떨어졌습니다. 1980년 11월 3일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 재판을 본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에서 김대중 석방을 요구했으며 특히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김대중 석방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1981년 11월 23일 3심에서 형이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고 미국으로 강제 망명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정치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1987년,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했지만 낙선하였고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정부의 경제위기(IMF 사태) 속에서 당선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습니다.

 

대통령 재임시절 업적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2월 25일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재임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고 IMF 경제 위기를 극복했으며 남북 관계 개선, IT 산업 육성, 복지 정치 확대 등을 주요 업적으로 남겼습니다. 자세한 업적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IMF 경제 위기 극복입니다. 1997년 말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받으며 경제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경제 위기를 벗어나고자 부실기업 정리 및 금융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큰 예로 대우그룹 해체가 있습니다.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나라 살리기에 앞장섰습니다. 외환보유고 증대를 위해 외국인 투자 유치를 했습니다. 또한 벤처기업 및 IT 산업을 지원하여 신성장 동력을 확보했습니다. 네이버, 다음 같은 IT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2001년 IMF 조기 졸업하고 경제 회복에 성공했습니다. 

둘째 남북 화해 정책입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북한에 방문하였습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남북 경제 협력 및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추진했습니다. 남북 화해 정책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셋째 IT 산업 육성입니다. 정보화 시대 기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전국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산업 성장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행정 업무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기 위해 전자정부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IT 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넷째 복지 정책 확대입니다. 2000년대 저소득층에 대한 국가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의료보험을 통합하여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를 정착시키고 노인과 장애인 복지 정책을 더 강화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발전과 정치 개혁입니다. 언론 검열을 완화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재벌과 정치인의 유착 관계 청산에 노력하고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방자치제를 활성화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

 

가족

김대중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의 대통령입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입니다. 가족은 부인 이희호 여사와 아들 3명을 두었습니다. 특히 부인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여성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3명의 아들은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을 두었습니다. 아들 모두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