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고려는 918년 태조 왕건이 최초로 세웠습니다. 1392년 조선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약 474년 동안 한반도를 통치한 왕조입니다. 고려는 통일 신라의 쇠퇴 과정에서 등장합니다. 고려는 새로운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했고,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고 다양한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내부적 권력 다툼과 외세의 잦은 침략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마침내 조선의 개국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1. 고려의 건국 배경
고려가 등장하기 전 한반도는 통일 신라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9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중앙 정부의 힘은 약해지고 지방 세력이 커지면서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로 분열됐습니다. 이를 후삼국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게 됩니다. 궁예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북부와 중부 지역을 차지합니다. 당시 왕건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왕건은 원래 송악(현재 개성) 지방의 유력한 호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세력을 키운 사람입니다. 이 과정에서 백성과 호족들에게 신망을 얻고 군사와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반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폭정과 강압적인 정책을 펼쳐 내부의 반발이 키웠습니다.
918년,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은 반란을 일으켜서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게됩니다. 왕건이 세운 새로운 왕조는 바로 고려입니다. 고려의 수도를 개경(현 개성)으로 정했습니다. 고려는 단순히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미를 국호에 담았고 이를 통해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했습니다.
2. 고려의 발전과 국가 체제
(1) 태조 왕건의 정책
태조 왕건(재위 918~943년)은 통일을 목표로 삼고 많은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왕건은 호족과의 연합 정책을 펼쳐 신뢰를 얻었고, 결혼 정책(정략결혼)을 활용하여 지방 세력을 포섭했습니다. 그리고 후대 왕들에게 남긴 10가지 유훈인 훈요십조를 남겨 후대 왕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지침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훈요십조는 왕건이 자신의 정치 철학과 고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내용입니다.
태조 왕건은 특히 민심을 얻기 위해 발해 유민을 포용하고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새로운 민족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2) 광종과 중앙집권 강화
고려의 제 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년)은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노비안검법이었습니다.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왕권을 지지하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능력 중심의 관료체제를 마련했으며,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원하여 왕권의 정당성을 강화했습니다.
(3) 문벌 귀족 사회의 형성
11~12세기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의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독차지하면서 사회 구조가 정착되었습니다. 문벌 귀족들은 과거제와 음서제를 통해 관직을 세습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폐쇄적 정치 운영은 점차 왕권을 약화시켰고 백성들의 사회적 불만을 초래했습니다.
3. 고려의 쇠퇴와 멸망
(1) 무신정변과 왕권 약화
1170년 문벌 귀족들의 횡포에 반발하여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무신정변이라 합니다. 고려는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간 무신들의 권력을 지배하게 됩니다. 무신들은 강력한 군사 정권을 구축했으나 내부적으로 권력 다툼이 심했고 외부적으로는 농민 반란으로 인해 정권이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만적의 난(1198년) 과 같은 노비들의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도 농민들이 잇따라 봉기하면서 고려 사회의 불안정성이 악화되었습니다.
(2) 몽골의 침략과 원 간섭기
고려는 13세기 들어서면서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231년부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고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저항했으나 결국 1270년 몽골과 강화를 맺고 원(元)의 간섭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려는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부마국(황제의 사위 국가)으로 전락했으며, 왕실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원은 고려에 정동행성과 쌍성총관부 등의 통치 기구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했습니다. 그리고 공녀(貢女)와 부역을 강요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려 내부에서는 원나라에 반감을 갖는 반원(反元)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공민왕(재위 1351~1374)이 개혁을 시도하여 원의 영향력을 축소하려 하였습니다.
(3) 고려의 개혁과 신흥 무장 세력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개혁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잃었던 영토를 찾아왔습니다.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자주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고, 결국 공민왕은 암살당하게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사망 이후 고려는 정치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신흥 무장 세력들이 등장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입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1388년)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4)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1388년 고려의 우왕은 요동 정벌을 명령했으나, 신흥 무장 세력인 이성계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요동 정벌을 하러 간 그는 위화도에서 군을 돌려 정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의 실권은 완전히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선을 세웁니다. 마침내 고려는 474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5) 결론
고려는 후삼국 통일을 이루며 한반도에서 중요한 왕조로 자리 잡아 약 474년 동안 유지됩니다. 그 과정에서 문벌 귀족의 부패, 무신들의 난, 외세의 침략, 그리고 신흥 무장 세력의 부상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멸망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 체제로의 변화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가 질서가 정립되었고, 이는 한반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